'위로하는 정신 몽테뉴' 독후감
- 리뷰
- 2020. 12. 28.
성탄 무렵 지지부진한 정치현실에 패배감과 무기력함을 느낀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럴 때 딱 맞는 책이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입니다.
오헝 제국에서 인문학의 정수를 만끽하며 자라난 유대인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세상은 꼬일대로 꼬여 있었습니다. 나치가 발호하며 그간 믿었던 모든 가치들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멀리 브라질까지 망명했지만, 평생 모아둔 온갖 사료들을 챙겨오지 못해 글 쓰기도 힘들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NAS만 챙겨오면 되겠지만 말이죠. 망명지의 셋방 지하실에서 몽테뉴의 수상록을 만난 것이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 줬습니다.
이 책은 몽테뉴의 평전입니다. 평전이면 인간이 세상과 충돌하여 산란하는 여러 사건들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몽테뉴는 완벽하게 자기 안에 침잠했기 때문에 사건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평전은 별다른 사건 없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건이 있긴 하죠. 오늘도 신림동 고시원에서 일어나 공부는 안 하고, 하루종일 인터넷 서핑만 즐기다 잠자리에 드는 김모씨의 일상 비슷한 사건들입니다.
몽테뉴의 아버지는 벼락출세한 신흥 귀족으로 돈만큼 명성이 따르기를 바랐습니다. 자식을 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키우는데 투자했죠. 그래서 어린 아기 주변을 라틴어 화자들로만 채워, 모국어가 프랑스어가 아닌 라틴어가 되게 만듭니다. 2020년 한국의 부모들도 떠올리는 기발한 착상을 600년 전에 실천한 것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철저하게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며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아이에게 금지된 것이 하나도 없이 그가 지닌 성향의 모든 부분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런 슈퍼 맞춤형 교육은 하나의 실험이었는데 여기에 위험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반대를 겪거나 그 어떤 훈육을 받은 적도 없이 그런 식으로 버릇을 들이면, 아이가 타고난 악덕을 멋대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다. 몽테뉴 자신도 뒷날 이렇게 느슨하고도 배려심이 깊은 교육방식이 자기에게 잘 들어맞은 건 오로지 행운 덕분이었다고 인정했다. “내가 올바르게 성장했다면 어느 정도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우연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버릇없는 성향을 갖고 태어났더라면 상당히 탄식할 만한 결과를 빚어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나면 집을 벗어나 외부의 주입식 교육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반작용이 일어나게 되어있죠.
어린 시절의 교육방식 덕분에 나중에도 그는 강력한 강압에서 비롯된 긴장과 어렵고 규칙적이고 의무가 따르는 모든 일을 가능하면 피하고 언제나 오직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변덕만을 따르려는 버릇을 지녔다. 그가 자주 자기 자신에 대해 탄식하곤 하던 저 ‘연약함’, 저 ‘근심 없음’은 아마도 어린 시절에 그 뿌리를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언제나 자유롭게 남아 있으려는 의지, 절대로 남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 꺾을 수 없는 의지도 여기에 뿌리를 둔 것이다. 뒷날 몽테뉴가 자부심을 품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선량한 배려 덕분에 얻은 것이었다. “나는 완전히 내 안에 머물면서 좋을 대로 스스로를 이끌어가는 일에 익숙한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다.”
자유로운 영혼의 몽테뉴는 판사가 됩니다. 온 프랑스가 신교와 구교로 분열되어 팽팽히 맞서던 때 옳고 그름을 계량하는 전선에 나서게 된 것이죠. 적성에 맞을리가 없습니다. 기억력이 나쁘고, 줄타기도 못하는 몽테뉴가 그 일을 잘 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10여년이 지나 결국 이 일로 출세할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향집에 견고한 보루를 세운 뒤 천 권의 책이 든 서재를 만들어 그 속에 틀어 박힙니다. 그렇다고 이 책들을 죽자고 탐독한 것은 아닙니다.
언제라도 내킬 때면 그것들을 즐길 수 있음을 알기에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만족한다. 나는 전쟁 때나 평화 시에도 책 없이 여행한 적이 없다. 하지만 여러 날 여러 달이 지나도록 책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도 많다. 차차 읽게 되겠지, 이렇게 나 자신에게 말한다. 내일이나, 아니면 언제든 마음이 내킬 때 …… 책이란 삶이라는 여행에 가져갈 수 있는 최고의 양식임을 깨달았다
책을 장식품으로 즐기는 장서가를 위로하는 말입니다. 이런 몽테뉴를 고상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에는 더 적확한 표현이 있죠. 히키코모리. 다른 것이 있다면 몽테뉴가 심취한 것은 저패니메이션과 망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신 안으로 침잠하여 온갖 질문을 던집니다.
몽테뉴가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동안 프랑스에서는 신교와 구교가 각자의 신앙으로 서로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원한이 원한을 낳으며 증오가 스노우볼처럼 굴러갑니다. 화해하려는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교를 대표하는 나바르의 앙리는 구교의 마고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좌의 게임 못지않은 피의 결혼식이 되어 버리죠. 결혼식은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이어집니다.
히키코모리 몽테뉴는 은둔의 시절, 타인의 삶 대신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수상록'을 저술합니다. 수상록은 살면서 여러 차례 읽어볼 가치가 있는 고전입니다. 난중일기보다도 15년 전 지어진 책이라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을텐데, 그럴 때는 어미를 '~이라능', '~한다능'으로 바꿔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몽테뉴가 착각한 것이 있었다면, 침잠하기 시작한 38살에 너무 늙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걸 10년 뒤에나 깨닫게 됩니다.
첫째 오류는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이미 늙었다고 믿었다는 점, 너무 일찍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고 산 채로 관 속에 들어가 누웠다는 점이었다. 이제 마흔여덟 살이 되었는데 놀랍게도 감각이 흐릿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맑아지고, 생각은 더욱 명료해졌으며, 영혼은 더욱 침착해지고 호기심에 넘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 사이 몽테뉴의 수상록은 궁정에까지 퍼져, 몽테뉴는 만인이 우러러보는 당대의 지성이 되어버립니다. 흐르는 물처럼 잔잔한 몽테뉴의 일생에서 최고의 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인상적인 장면은 있습니다. 신교의 수장 나바르의 앙리가 내전에서 승리한 후 그를 찾아와 구교와 중재 역할을 맡긴 것입니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던 판사 몽테뉴에게 딱 걸맞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중재가 이루어졌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결과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승자인 나바르의 앙리는 패자의 종교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대관식을 치러 앙리4세가 됩니다. 두 파로 분열된 프랑스는 통합됩니다.
모든 이에게 믿고 싶은 종교를 믿을 자유를 부여한다. 누구도 종교를 이유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아니된다.
낭트 칙령 1598.
그렇다고 몽테뉴가 대단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어느 한쪽 편을 들라 강요할 때, 그저 다양성을 말한 것 뿐입니다.
그는 삶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자연에는 목적이 없는 것이 없으며, 심지어 목적 없음조차도 그렇다. 우주에는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는 추한 것이 아름다움을 눈에 보이게 만든다고 하여 사랑했으며, 죄악은 미덕을 드러낸다고, 어리석음과 범죄도 각각의 이유에서 사랑했다. 모든 것이 좋으며, 신은 다양성을 축복했다.
흑백의 세상에서 다양성의 가치를 말했기에, 몽테뉴의 말들은 수백 년간 생명을 잃지않고 많은 이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망명지의 츠바이크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큰 실망감을 주체하지 못한채 1942년 2월 아내와 함께 목숨을 끊습니다. 유럽의 전쟁은 깊어져 가고,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막 일으켜 온 세계에 화약 냄새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가장 어두웠던 한해를 버티지 못하고 카나리아처럼 세상을 등진 것입니다. 포연이 가신 뒤 어느 때보다 인본주의가 가득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상이 다가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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