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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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민족대표 33인이 맞지만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 않았고, 이에 당황한 군중 앞에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읽으면서 3.1운동의 트리거는 정재용 선생이 당기셨고, 

운동의 파급도 33인의 의도나 예측과는달리 유관순 열사와 같은 학생들과 민중들로 부터 인편이나 편지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무오독립선언서는 먼저 선언낭독되었고 그 참여자들 역시 매우 활발히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이라는 일관된 목표를 향해서 나간 점도 있습니다.

심지어 무오독립선언서에 참여한 분들의 평균수명은 민족대표33인에 비해서 5년이상 짧습니다. 

그만큼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고 위험을 짊어졌다고 봐야겠죠.

 

그런데 지금돌이켜 보면 그들보다 민족대표33인이 더 기억에 남고, 

심지어 과거 교과서로 민족대표 33인이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을 벌인 것으로도 배운 분들도 있습니다.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이렇게 배운 분들이 대다수일겁니다. 그래서 90년대 이전의 교과서로 공부한 분들은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 당시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하는 분들도 계시겠고요.

(반대로 그 당시 이에 비판적 사관을 가진 역사선생님들은 엄청나게 비판을 하셔서 기억에 남으시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교과서나 초등생을 위한 역사서들(용선생 한국사 등등)에도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것은 맞지만, 

대중 앞에 나서지 않아서 군중들은 당황했고, 3.1운동은 당황한 민중 속에서 용감한 청년(30대도 청년입니다)이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됐다고 정확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0~30년 사이에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과거에는 민족대표33인을 3.1운동의 이념적 상징, 그러니까 지도자로보고서 그 역할을 강조하는 견해가 더 컸다면, 

지금은 민족대표 33인을 민족자결주의와 비폭력저항운동만 생각하다가 

그들 스스로를 태화관에 가둬서 탑골공원의 민중과 격리시킨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견해가 커졌다는 것이겠죠.

결국 현재에는 3.1운동의 이념적 상징을 민족대표33인에서 찾지 않고 

그 당시 3.1운동을 전개했던 수많은 민중에게서 찾으려는 시도가 그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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